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르됭 전투 (문단 편집) == 그 외 == 본래 협상국 주요 4개국([[영국]], 프랑스 제3공화국, [[이탈리아 왕국]], 러시아 제국) 회담에서는 1915년에 큰 피해를 입은 러시아를 배려하여 동부전선에서 현상 유지를 하고 나머지 3국이 일제히 서부전선에서 총공세를 펼치기로 합의가 된 상황이었다. 그러나 공세에 나서기도 전에 독일이 베르됭 전투로 선수를 쳤고, 상황이 급해진 프랑스는 기존의 합의를 제쳐두고 러시아에 급히 구원을 요청하게 되었다. 러시아가 이에 호응하여 벌어진 것이 러시아 제국 최후의 공세 작전 [[브루실로프 공세]]이다. 얼마나 참호전이 처절했던지, 100년이 지난 지금도 베르됭 일대의 지형은 포격으로 패인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을 정도다. 또한 아직 일부 지역은 아직 발견되지 못한 불발탄 및 지뢰로 인해 출입 통제지역이라고 한다. 전투에 사용된 폭탄 중 25%가 불발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. 폭탄 제거반이 1년에 50여 톤의 폭탄을 수거하고 있지만, 이 정도 속도로는 300년은 더 있어야 모두 수거할 수 있을 것으로 [[https://www.youtube.com/watch?v=YNIBE64CAgs|예측]]되고 있다. [youtube(k9KZL77eOec)] 현재 베르됭 인근의 마을 모습. 지도상에도 존재하며 시장도 뽑지만, 실제로는 잔해조차 없는 숲으로 변해버렸다. 이 전투로 '''[[고구려-수 전쟁|1,300년전 동아시아에서 벌어졌던 동원 병력 규모의 세계기록]]'''이 경신되었다.[* 고구려-수 전쟁에서는 수나라 전투병력만 113만 3,800명이었으며, 보급부대는 그 배였다고 기록되어 있다. 전근대국가치고 규모가 너무 거대한 탓에 일각에서는 실제 규모는 훨씬 적었다고 추측하기도 하지만 기록이 워낙 자세한 탓에, 100만 대군에 회의적인 측도 전투병력의 합이 아니라, 보급부대 등 비전투인원을 전부 포함해서 110만 명이며, 그 배라고 하는 보급부대는 군대라기보다 잡부라는 식으로 당시 기록을 토대로 추산하고 있다. 200만 명이라는 기록은 수나라 당시 전체 인구의 7%에 육박하는 규모로 통일된 중국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규모이며,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까마득한 고대 전쟁의 동원병력 규모 기록이 왜 현대 총력전의 시초인 베르됭 전투에 이르러서야 깨질 수 있었는지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. 추가로 일격에 고구려를 멸망시키지 못한 수나라가 필연적으로 자멸하게 된 이유도 된다.][* 베르됭 전투 이후 이 기록은 무려 '''30번''' 이상, 그것도 개월 단위로 끊임없이 갱신된다. 그리고 마침내 1941년 [[바르바로사 작전|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 개시]]가 현재까지의 최고 기록이다. 2023년 현 시점, 저 기록은 향후에도 깨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.] 당시 서양에서 그 전투의 존재나 역사상의 의의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는지, 지금도 관심이 있을지는 의문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